국제한국사학회

[반병률] 블라디보스토크와 신한촌 '서울스카야울리차'로만 남은 옛 한인 거주지
작성자 : 관리자 등록일시 : 2011-03-29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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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새로운 극동 해군기지로 부상하기 시작한 블라디보스토크 군항에는 1870년대 이래 각종 시설물의 건설공사장이나 하역작업장에 한인들이 몰려와 작업인부로 일했다. 이들은 도시 중심부(현재 ‘극동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위해 투쟁한 전사들의 광장’일대)에 몰려 살았다. 인근이 중국인 거주지역이었던 이곳은 ‘백만장자’라는 뜻의‘밀리온까’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청결하지 못했다.

1885년과 1892년 콜레라 전염병이 발생하자 시당국은 1893년 도심의 한인 및 중국인들을 서쪽 외곽지대의 새로운 거류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러시아인들은 새로운 한인 거류지를‘까레이스카야슬라보드까(한인 거주지역)’라고 불렀고, 한인들은 우리식으로 개척리(開拓里)라고 했다. 당시 한인 절대 다수가 함경북도 육진(六鎭)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어서 개척리를 육진 방언으로 ‘개체기’라 불렀다. 요즘의 러시아 연해주 지도에 간혹 ‘개체기(Kachegi)’라고 러시아 글자로 표기된 지명들을 볼 수 있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이후 한인 관련 지명들이 대부분 소멸됐음에도 이렇게 그 뜻도 모른 채 끈질기게 남아 있는 것이다.
 
‘개척리’는 ‘개체기’란 러시아어로 표기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사절단으로 참석했던 민영환 일행은 귀국길에 10월 10일에서 15일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 민영환 일행은 연해주 군무지사인 운쩨르베르그를 비롯한 러시아 고위관리들을 만났으며, 호텔로 찾아온 한인들과도 면담했다. 그리고 개척리 한인도소(都所 : 민회)를 방문했고, 한인들은 며칠 후 민영환 일행을 도소에 초청, 대환영연을 열어 주기도 했다.

그런데 아무르 탐험대원인 V. V. 그라베가 1912년에 간행한‘연흑룡주의 중국인, 한인 그리고 일본인’에 나오는 개척리의 모습은 놀랍다. “외형적 모습이 소름 끼칠 정도로 열악하고 거리는 좁고 불결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 한인들은 원래 기질상 청결하고 집안을 주도면밀하게 꾸며 놓고 사는 것으로 알았던 그는 이 모순을 일시 체류하는 계절형 노동자들이라 환경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으로 풀이했다.
 
또 영국의 여행가 I. B. 비숍은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한인들의 빈곤과 무력함을 이들의 기질 탓으로 돌렸다가 연해주 남부 한인 농민들의 활기차고 윤택한 생활을 보고 나서는 생각을 바꿨다. 즉, 한인 농민들의 생활수준의 차이는 러시아와 조선의 관리들의 통치방식과 관행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개척리는 블라디보스토크 서쪽 아무르 만 해안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한반도로부터 배를 타고 오는 한인 이주민들이 멀리 호랑이산(고라 찌그로바야 : 현재 블라디보스토크 호텔이 위치한 산)을 보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음을 알았다고 한다. 개척리의 중심지는 현재 스베틀란스카야 거리가 시작되는 서쪽 끝의 스포르치브나야 가방(Sports Harbor) 해변가 일대였다.
 
아무런 한인 유적을 찾아볼 수 없는 이곳은 현재 대형 스크린 영화관인 오께안 극장, 그리고 러일전쟁에서 전사한 러시아의 해군제독 S. O. 마카로프의 동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오른쪽 해안 일대이기도 하다.  당시 한인들은 마카로프 제독 동상의 바로 아래쪽 언덕을 ‘둔덕마퇴,’ 그 북쪽의 해안가 낮은 저지대를 ‘웅덩마퇴’라고 불렀다.

개척리를 가로질렀던, 과거 ‘한인거리’라는 뜻의 ‘까레이스카야울리차(Koreiskaia Ulitsa)’는 현재 포크라니치나야울리차(국경거리)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현지 한국총영사관이 옛거리 이름을 되찾기 위해 외교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스포르치브나야 가방 해변가 일대가 중심지
 
새로이 개척리를 조성했음에도 위생 상황이 개선되지 않자 결국 1910년 시당국은 다시 개척리 거주 한인들의 이주를 결정했다. 1911년 3월 신임 연흑룡주 총독 곤닷찌는개척리를 순시하고, 연해주 군정순무사에게 4월 15일까지 개척리를 정리하고 새로운 거주지를 배정할 것을 지시했다.

새로운 한인 거주지로 아무르 만의 동쪽 해안지대인 라게르늬곶과 쿠즈네쵸프곶 사이의 언덕 일대가 선정됐는데, 오늘날의 하바로브스카야울리차, 아무르스카야울리차 등의 거리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 1911년 5월부터 한인가옥들이 들어서면서 ‘노바야까레이스카야슬라보드까(Novaia Koreiskaia Slobodka)’ 즉, 신한촌(New Korean Village)이 형성됐고, 한인들은 이전의 개척리를 ‘구개척리,’ 신한촌을 ‘신개척리’라 구별했다.

신한촌은 순전한 러시아식 건물들이 즐비해 초옥, 움막, 돌막집 등 한국식 집 일색이었던 구개척리와 크게 대비됐다. 신한촌은 1914년 5월 당시 입적 한인(원호인)이 소유한 가옥에 300여 호, 3천여 명이 거주하는 대규모 집단촌으로 성장했다. 이후 신한촌은 연해주를 오가는 동포들이면  필히 거쳐가는 곳이 됐고 국내외 동포들의 사랑을 받아 ‘원동의 서울’이라는 애칭을 가졌다.

개척리와 신한촌에서 활동하던 한인지도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헤이그밀사 사건의 정사 이상설,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한말 고종의 최측근 이용익의 손자로 연해주와 북간도의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던 이종호, 한말의 전설적인 의병장 홍범도를 꼽을 수 있고, 유인석, 안창호, 신채호, 박은식 등이 이 곳을 거쳐갔다.
 
수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 거쳐가
 
1937년 9월에서 10월에 걸쳐 러시아 극동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 약 17만 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다. 신한촌의 한인들 역시 근처의 페르바야레츠카 역에서 화물차에 실려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 등지로 이송됐다. 한인들이 살던 집은 이후 유럽 러시아에서 온 노동자들이 차지했다.

현재 신한촌은 아파트촌으로 바뀌어 있다. 러시아인 소유의 한 집에 걸려 있는 ‘세울스카야울리차(서울거리) 2-A’라는 주소를 적은 문패가 과거 이곳이 한인들이 살던 신한촌이었음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대한항공 기내배포 격주간지 <> 2011년 3월 13일자(281호).
 
<반병률 /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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