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원] 대한문과 시청 앞 광장의 기원
작성자 : 관리자 등록일시 : 2009-07-24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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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현대의 교량, 대한제국의 등장

                  

-대한문과 시청 앞 광장의 기원-


                                                                이 민 원



● 2002년 한일월드컵과 시청 앞 광장의 ‘대한민국!’


  금년 여름 8ㆍ15행사 명칭을 둘러싼 논란으로 대한민국이 한층 달아올랐다. 건국 60주년인가 광복 63주년인가가 그것이다. 따지고 보면 매년 광복과 건국 관련 행사는 반복될 것이다. 광복만 중시할 경우 건국의 의미가 축소되고, 건국만 중시할 경우 광복의 의미가 소홀히 될 수 있다. 그러나 광복과 건국 모두 깊은 의미를 지닌다. 국가를 소중히 여기다보니 의론이 분분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광복이냐 건국이냐 우리는 논란을 벌이지만, 정작 세계인들이 '대한민국'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은 몇 년이 안 된다. 세계화 시대에 무슨 소리인가 하겠지만, 세계인이 대한민국이란 것을 알게 된 불과 수년 전, 그러니까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이다. 한일월드컵은 성숙한 시민사회의 열정으로 새로운 축제문화의 장을 이룩한 국제 행사였다. 수백만 한국인들이 거리로 나왔지만 질서정연했고 깨끗했다. 이 축제에서 그동안 소외된 듯 했던 나라의 이름(대한민국), 깃발(태극기), 노래(애국가), 꽃(무궁화)이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기성세대가 어두운 이미지로 기억했다면, 신세대는 오히려 밝고 창조적으로 이들에 다가섰다.

  이것은 분명 종전과는 다른 현상이자 새로운 문화창조의 신호였다. 시청 앞 광장과 태평로는 그런 변화의 핵심적 공간이었다. 거기로부터 전 세계로 울려퍼진 구호가 ‘대~한민국!’이다. 뉴스위크지의 어느 기자는 ‘대한’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오기도 했다. 황당하게 보였지만, 대한민국이 ‘은둔의 왕국’처럼 세계인의 인식에서 멀었던 것도 사실이다. 세계인들은 그때서야 'The Republic of Korea'의 ‘본명’이 대한민국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100여 년의 통한’을 털어내는 반가운 변화였다. 그렇다면, 대한이란 국호는 어디서 유래하는가. 수십만, 수백만의 인파가 몰려 ‘대한민국!’을 연호한 서울거리, 특히 시청 앞 광장과 태평로 거리의 기원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비밀은 바로 대한제국에 있다.


● 19세기 말의 격동과 조선의 현실


  현재의 세종로와 광화문 앞 공간은 조선왕국 건국 초기로 그 유래가 소급된다. 그러나 시청 앞 광장과 태평로 거리는 주로 대한제국 이후의 역사와 연관이 있다. 전자를 왕의 거리라 한다면, 후자는 황제의 광장이라 하겠다. 시청 앞 광장과 거리의 조성은 근대화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지만, 처음 시작될 무렵에는 오히려 안보상의 이유가 작용했다. 물론 이후 정부의 개혁이 추진되면서 도로와 광장의 건설로 가닥이 잡혀갔고, 그것을  대한제국기의 도시개조사업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당시 문명의 이기로서 막 도입되기 시작한 전기와 전화, 자전거와 자동차, 전차와 기차 등을 감안할 때 도로의 정비는 필수적이었다. 사람의 이동이 빨라지면서 큰 도로와 광장의 조성도 필요하였다. 그러한 변화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말, 대한제국이 선포될 무렵이다. 이 변화는 ‘자주적 근대화의 역량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도시계획이라고 하기는 무리인 점도 있지만, 산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정부가 추진한 개화정책, 그리고 안보와 소통을 감안한 도로와 광장의 조성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당시 시대 분위기를 보자. 한국의 근대에서 가장 큰 변화를 초래한 것은 청일전쟁이다. 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아시아의 패자로, 마침내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해 갔다. 청국은 국력이 곤두박질침과 동시에 열강의 분할 대상이 되어 반쯤 식민지가 되어갔다. 그리고 조선은 보호국화 직전 단계까지 내몰리며 위기가 거듭되었다. 이때 야기된 사건이 명성황후시해, 단발령, 아관파천 등이다. 국가 권력의 중추가 유린되고, 전래의 관습이자 남성의 상징이던 상투가 잘렸으며, 군주는 정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대한제국 선포 바로 1~2년 전의 조선 사정이 그랬다.


● 고종의 환궁과 경운궁 주변의 정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게 되자 조야에서 환궁을 요청하는 상소가 쇄도했다. 국가체면의 손상이니 속히 환궁하여 자주권을 확립하라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그 점은 누구보다 고종이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환궁을 하여 자주권을 확립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고종은 세 방면의 조치를 취한다. 첫째, 독립신문 창간, 독립협회 창립, 독립문 건립을 후원하였다. 둘째, 민영환특사를 러시아에 파견하여 군사ㆍ재정에 관한 협조를 구하였다. 그 결과 군사교관을 초빙했고, 이들은 궁궐경비병 8백 명을 양성하였다. 셋째, 러시아공사관에 이웃해 있던 경운궁과 그 주변의 도로를 정비하였다. 언론과 집회를 장려하여 자주독립 의식을 환기하며, 경운궁을 중심으로 국정을 수행해가겠다는 뜻이었다. 이 모두 환궁과 개혁 추진을 위한 정지작업이었다.

  그래서 경운궁의 벽도 보수하고, 시야를 가리는 경운궁의 인화문과 대안문 앞의 가옥들을 철거하였으며, 도로도 확장하였다. 이때의 결과는 대한제국기, 일제하,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도로 정비를 거치면서 오늘날 대한문 앞의 광장, 즉 대한문과 서울시청, 플라자 호텔사이의 시청 앞 광장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즉 현재 시청 앞 광장과 태평로 거리의 등장은 대한제국 선포 시기로 그 기원이 소급되는 것이다. 오늘날 이 지역이 서울의 교통 소통은 물론, 2002년 월드컵 당시와 같은 국가적, 세계적 행사 때의 축제공간으로 기능하게 된 것은 참으로 감회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러시아공사관을 떠나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고종의 어가는 경운궁의 정문인 인화문을 통과하여 침전인 함녕전에 도착하였다. 물론 조선의 병사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환궁하였다. 러시아수병들이 담당했던 고종의 신변 호위는 이제 조선군 경비병에게 임무가 넘겨졌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왜 고종은 경운궁을 택하였나. 경운궁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좁은 곳이다. 궁궐은 물론 개인의 택지, 묘소 선정에서 조차 풍수를 존중하던 당시 사회의 일반적 풍토를 통호 볼 때, 또한 국정수행을 위한 실용적 규모나 시설 등 여러 면에서 볼 때 경운궁은 부족함이 많았다. 그럼에도 고종이 경운궁을 택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 보다 군주의 안전 문제와 경복궁의 어두운 기억 때문이다. 청일전쟁 수일 전 일본군은 경복궁을 기습하여 조정을 붕괴시켰고, 고종과 대신들을 연금하였다. 이듬해도 재차 침입하였다. 조선군의 낡은 장비와 빈약한 병력으로는 이를 저지할 방도가 없었다. 한편 경복궁은 고종과 왕태자에게 지옥과 같은 기억을 떠올리는 장소였다. 30년간 고종과 고락을 함께 명성황후가 처참하게 희생되었고, 충신과 장병들이 일본군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다. 고종은 이 어두운 장소를 벗어나고 싶었다.

  반면 규모가 작은 경운궁은 방어에 유리했다. 각국 공?영사관도 주변에 위치하여 비상시 일본의 공격에 대응하기가 용이했다. 그래서 고종은 경운궁을 택하였다. 사실은 비극적이었고, 백척간두에서 택한 결정이었다. 그 때 간절했던 자주국으로의 열망, 부국자강에 대한 꿈은 지난 1백여 년의 시련을 극복하면서 성취되었다. 마침내는 한강의 기적으로 표현되었다. 바로 그런 발전 위에서 치른 축제가 88올림픽이었고, 2002년 한일월드컵이었다. 이때 한 세기 전에 암울했던 대한문 앞 거리는 밝고 경쾌하고, 즐거운 축제의 마당으로 변하였다. 시청 앞 광장과 태평로 거리가 그렇다. 출발은 미미하였지만, 현재는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축제와 소통의 광장이자 거리로 발전한 것이다.


● 황제즉위식 당시의 ‘태평로 거리’와 ‘시청 앞 광장’ 


  고종이 경운궁에 머물 때 역사의 중심무대는 정동으로 이동하였다. 고종이 환궁하자 먼저 황제즉위를 요청하는 상소가 조야에서 쇄도하였다. 1897년 10월 초 고종은 황제즉위건을 재가하였고, 10월 11일과 12일에 황제즉위식 의례가 진행되었다. 황룡포를 입은 황제의 어가는 오늘날의 시청 앞 거리를 가로질러 회현방 소공동계(웨스틴조선호텔 자리)에 위치한 환구단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게 된다.

  기록에는 이러했다. ‘당시 거리의 민가와 상점에서는 등불을 달아 길들을 밝혔다. 각 가정에 태극기를 달아 애국심을 표하였고, 각 대대 병정과 각 처 순검들이 경계를 섰다. 11일 오후에는 경운궁에서 환구단까지 즉 시청앞 길을 가로질러 군사들이 정연하게 배치되었고, 순검들도 몇 백 명이 틈틈이 벌려 서서 황제 나라의 위엄을 드러내었다. 군사들이 어가를 호위하고 지나갈 때에는 위엄이 웅장했고, 총검이 석양에 빛을 반사하여 빛났다. 육군 장관들은 금수로 장식한 모자와 복장을 하였고, 허리에는 은빛의 군도를 찼다. 어가 앞에 황제를 나타내는 태극기가 먼저 지나갔고, 황제는 황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금으로 채색한 가마를 탔다. 그 뒤에 황태자가 홍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쓴 채 붉은 가마를 타고 지나갔다. 십이일 오전 2시 다시 위의를 갖추어 환구단에 가서 하늘에 제사하고 황제 자리에 나아감을 고하였다. 황제는 오전 4시 반에 환어하였다. 동일 정오 만조백관이 예복을 갖추고 경운궁에 나아가 황제에게 하례했고, 백관이 황제폐하만세를 불러 환호하였다.’

  이렇게 등장한 대한제국은 간난이 지속되는 가운데 출발한 한국사상 초유의 황제국이다. 현재의 시청 앞 광장과 태평로, 그리고 덕수궁과 웨스틴조선호텔 자리는 당시 이 모든 행사가 벌어진 축제의 공간이었다. 이후 이들 장소는 자연스레 대한제국 역사의 중심무대로 부상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한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즉위식 행사가 진행된 공간이자, 행사를 축하하는 서울 시민과 어가를 호위하던 대한제국의 군인과 순검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축제의 공간이었다. 이렇게 볼 때 시청 앞 광장과 태평로 거리는 황제의 광장이자 거리였다고도 할 수 있다.


● 황제 등장과 국호 대한의 의미


  진시황 이래 중국의 역대 군주는 황제를 칭하였다. 그러나 조선 등 주변국 군주는 대부분 왕을 칭하였다. 이들은 매년 중국에 조공을 했고,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가문의 족보와 비문에도 중국의 연호를 썼다. 동양은 중국의 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서세동점 이래 세계관이 확대되고, 문호가 개방되면서 자의식이 싹텄다. 나라의 자주권 확립에 대한 관심이 조야에 고조되어 갔다. 고종이 서구 열강과 조약을 적극 추진한 데에도 그런 고려가 있었다. 이후 화두가 된 것이 칭제건원이다.

  고종의 황제 즉위를 거론한 인물 중에는 김옥균도 있고, 그를 암살한 홍종우도 있다. 노선은 다르지만,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황제즉위는 공통된 화두였던 것이다. 이 문제가 조정에서 적극 공론화한 것은 고종의 환궁 이후였다. 논리는 이러했다. ‘왕이란 황제보다 낮다. 조선인들은 왕을 황제에게 종속적인 존재로 여겨왔다. 따라서 황제즉위는 우리의 군주가 누구에게든 독립적이며 아무에게도 낮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줄 최선의 수단이다.’ 즉 황제가 없으면 독립도 없다는 일반의 의식 상태를 고려할 때, 황제즉위의 조치가 꼭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국호를 대한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는 삼한을 아우른 것이니 큰 한(대한)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다는 논리였다. 대신 조선은 기자가 봉해진 때의 이름이니 제국의 명칭으로 적당하지 않다 하였다. 대한제국 선포를 각국은 어떻게 보았나. 러시아와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승인 축하하였고, 일본, 영국, 미국 등도 직ㆍ간접으로 승인 축하하였다. 그런데 청국은 조선이 감히 제국을 칭하다니 괘씸하다는 입장이었다. 청일전쟁 패배 보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청국 상인들을 위해 대한제국과 관계를 조정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황실 측은 자존심을 내세웠다. 그러다 2년 뒤 마침내 양국 황제의 이름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한ㆍ청 역사상 최초로 대등한 관계가 수립되었다.


● 대한제국의 근대화정책과 시청 앞 광장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종은 적극적으로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여 갔다. 정부의 제도와 조직을 고쳐갔고, 전기와 전화, 전차와 철도, 각종 학교의 설립과 공장의 건설, 병원과 위생시설을 들여놓았으며, 도로와 광장도 조성해 갔다. 도로 원표도 그 시기에 등장했다. 동시에 언론과 집회 활동을 독려하였으며, 간도와 울릉도 독도 등 영토에 관한 조치도 취하였다. 만국우편연합과 국제적십자사 등 각종 국제기구에 가입하고자 노력하였고, 벨기에,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국과도 관계를 발전시켜갔다. 이 모두 국제적 위상을 고려한 조치였다. 다른 한편 영세중립국도 부단히 모색하였다. 현실적으로 국력이 취약하고 일본의 압제가 강화되어가는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취한 대응 조치였다.

  접근 방법은 달랐지만, 정부 측과 신지식인ㆍ농민ㆍ유생 모두의 공통된 소망은 국가의 유지였다. 정부는 군주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대응하자는 쪽이었고, 황제와 제국은 그래서 탄생한 것이다. 1919년, 고종이 의문을 죽음(暴崩)을 당하자 거족적인 3ㆍ1독립만세 시위운동이 펼쳐졌고, 대한문 앞과 현재의 시청앞 광장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얼마 후 상해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하였다. 대한제국은 조선왕국과 대한민국을 이어준 징검다리이기도 했다. 전통과 현대를 이어주는 교량이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광장, 그리고 거리가 다름 아닌 태평로와 시청 앞 광장, 그리고 현대의 세종로 거리와 광화문 앞 육조거리였다.

  둘이켜 보면 경운궁과 주변 도로의 정비는 당초 군주와 조정의 안전을 위한 정비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이 지속되면서, 거기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추가되었다. 군주의 신변안전과 국가안보, 그리고 대한제국 황제의 근대화 정책, 이 세 가지가 두루 결합된 합작품이었다. 오늘날의 시청 앞 광장, 그리고 태평로 거리는 대한제국기의 경운궁과 대한문, 그리고 옛 환구단자리가 감싸고 있는 ‘황제의 광장’이자 ‘황제의 거리’였다. 그때 대한제국 관민의 간절했던 꿈은 한 세기의 시련을 거쳐 바로 그곳에서 밝고 경쾌한 고품격의 문화로 펼쳐져 가고 있다. 

<<대학원보>>, 경희대학교 대학원보사 , 200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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