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한국사학회

[반병률] 통합 임시정부를 위한 갈등과 타협
작성자 : 관리자 등록일시 : 2009-07-13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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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89특집/임정수립 90주년― 3·1운동에서 임시정부까지] [4] 통합 임시정부를 위한 갈등과 타협

지도자들 자파(自派)이익·지위 희생하며 동참 노령(露領)·한성(漢城)·상해(上海)임정 안창호 주도 통합작업 이승만 동참과정서 진통

반병률·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반병률 교수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여러 개의 임시정부 조직이 선포됐다. 이들 임시정부 대부분은 실체가 없는 '전단(傳單) 정부'에 머물렀고 노령(露領) 대한국민의회(3월 17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4월 11일), 그리고 국내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 임시정부(4월 23일) 세 정부만이 주목을 받았다.노령 국민의회는 러시아 영토와 간도, 상해 임정은 상해와 미주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던 데 비해 일제의 직접 지배하에 있던 국내의 한성정부는 자체의 정부조직안을 관철할 만한 처지에 있지 못했다. 그러나 한성정부는 국내 13도 대표들에 의해 구성됐다는 점에서 대내외적인 권위나 '법통성'에서 우위에 있었다. 한성정부는 수립 과정에서 계획했던 국민대회를 제대로 치르지는 못했으나, 270여명의 청년 학생들이 일제 당국에 의하여 체포·투옥됨으로써 국내에서 피로써 건설됐다는 저항적 권위를 갖게 됐다.이들 세 임시정부의 통합을 추진한 사람은 안창호였다. 그는 미국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위임을 받고 5월 25일 상해에 도착하였으며, 6월 28일 상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한 후 통합임시정부의 실현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8월초 러시아·중국·미국에서 상해에 와있던 대표들이 '국민대리대회'를 개최하고, 내외의 정부들을 모두 해소하고 한성정부를 받들어 상해에 임시정부를 두기로 하는 등의 통일안을 마련하였다. 이 통일안은 한성정부 각원(閣員) 명의로 국내외에 선포됐다.

독립기념관 제공

▲ 이승만 임정 대통령 부임 환영식 1920년 12월 28일 상해에서 열린 이승만 임시 정부 대통령 부임 환영식. 오른쪽 두 번째부터 신규식 박은식 안창호 이승만 이동휘 이시영 이동녕 손정도./독립기념관 제공

상해 임정은 그간 경쟁해오던 노령 국민의회와의 통합을 위하여 내무차장 현순과 김성겸을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하였다. 1919년 8월 30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현순과 김성겸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국민의회 상설의회 총회는 상해측 통일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통합임정의 국무총리로 선임된 이동휘가 영향력을 발휘한 결과였다.통합임정 실현의 최대 관건은 이승만의 참여 여부였다. 이승만은 3월 말에 성립된 '대한공화국 임시정부'의 국무경(國務卿)으로(이 대통령제 임시정부는 대통령에 손병희, 부통령에 박영효를 선임했다), 상해 임정의 국무총리, 그리고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에 선임되어 있었다. '대한공화국 임시정부'의 국무경 자격으로 활동하던 이승만은 한성정부 성립의 소식이 전해진 5월 말 이후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라는 직책을 내세우며 상해 임정을 부인하고 나섰다.한성정부안은 약법(約法)에서 집정관 총재인 이승만에게 사실상의 항구적인 독재권을 보장하고 있었다. 상해임정측은 이승만이 상해 임정을 부인한 사실에 매우 곤혹스러워했다. 결국 이승만의 반대에 봉착한 상해 임정 측은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를 '대통령'으로 바꾸기로 하고, 헌법개정안 마련에 착수했다. 임시의정원은 9월 6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각원들도 한성정부의 명단대로 임명되었다.이런 개조 작업은 노령 국민의회측의 불만을 불러일으켜 '승인·개조 분쟁'이 야기됐다. 국민의회측은 상해임정측이 국민의회와 의정원을 동시에 해산하기로 해놓고 상해의 의정원이 헌법 개정을 했고, "한성정부를 승인 또는 봉대하자"고 해놓고 독자적으로 개조를 하는 등 국민의회측을 기만했다고 비판했다. 결국 통합 임정의 교통총장으로 선임된 국민의회 의장 문창범이 취임을 거부했다.11월 3일, 그동안 취임을 보류하고 있던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하여 내무총장 이동녕, 법무총장 신규식, 재무총장 이시영, 노동국 총판 안창호가 취임식을 가짐으로써 통합 상해임정이 출범했다. 통합을 주도했던 안창호, 대통령 이승만, 그리고 국무총리 이동휘 등 세 사람의 지도자가 이끌어 '삼각정부(三脚政府)'로도 불린 통합임정의 출범은 국내외의 폭넓은 지지기반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통합 과정에서 상해임정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였던 안창호는 노동국 총판으로 지위가 격하되는 것을 감수했다. 구한말 이래 항일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러시아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이동휘도 통합의 대의에 따라 자파(自派)의 이익을 뒤로 한 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출범은 이렇듯 각 단체와 지도자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통합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함으로써, 후일 임시정부를 비롯한 항일독립운동전선에서의 분열과 대립의 씨앗이 되었다. 


* 이 글은 2009년 3월 25일 반병률 교수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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